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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암사동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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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부지방 빗살무늬토기
자연계의 동물로부터 분리되어 인간으로 진화하는 첫발을 내딛은 시점부터 인류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400만년이나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처럼 장구한 인류사의 대부분은 역사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선사시대에 속한다. 문자체계가 발명되고 기록된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불과 5,500년 전이고 그것도 세계의 극히 일부지역에 국한된 일인 것이다.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세계의 상당 지역은 무문자사회로 남아 있었으니 인류의 역사에서 기록된 부분은 극히 적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역사가 문자로 씌어지지 않은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하거니와 이 때 선사인들이 남겨놓은 물질자료를 통하지 않고서는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와 같은 물질자료를 고고학적 자료라고 하기도 하며 흔히 우리는 유물, 유구, 유적 등의 개념으로 정의하고는 한다.
유적이라 하면 흔히 선사시대 취락, 역사시대 성터나 절터, 고분군 등과 같이 유물과 유구가 집적되어 있는 곳을 떠 올린다. 그러나 고고학에서는 유적을 과거 인간에 의해 점유되었거나 인간행위가 이루어진 장소로 그것으로 인해 인공물이 축적된 곳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을 포함하는 공간적인 범주로 정의한다. 유적은 초기인류의 흔적이 발견된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문명사회에서 건설한 거대한 도시유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격과 수준이 있다. 수십, 수백만년 전의 초기인류와 관련된 유적은 그곳에서 과연 인류의 행위와 관련된 증거를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궁극적인 문제이다. 예컨대 동물들의 뼈 조각과, 석기, 그리고 인류화석이 하나의 퇴적층에서 뒤엉켜 나온다면 과연 그것이 인간의 행위와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인류의 유적을 해석할 때는 아주 면밀한 매장학적인 연구, 혹은 유적형성과정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해야 한다.
원래 수렵채집사회는 집단의 규모도 작고, 영구적인 구조물을 건축하는 일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유물이 생산 소비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구석시대인의 유적은 매우 미약한 흔적만을 남긴다. 그런데 시기가 내려올수록 비교적 뚜렷한 흔적이 남겨지기 마련이다. 30-40만년 전에 속한 야외주거지로 떼라 아마타(Terra Amata)의 집자리 흔적은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발견된 것인데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움막일 것이다. 구석기시대 유적은 야외유적과 동굴 및 바위그늘유적으로 크게 나뉜다. 일반 퇴적층에 석기와 집자리 혹은 불탄 흔적이나 석기 제작터, 도살된 뼈 등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야외유적이다. 이에 비해 동굴이나 절벽이 움푹 들어가서 생긴 바위그늘에 인류가 반복적으로 점유해서 형성된 유적은 동굴 안에 쌓인 퇴적층 마다 인간 거주의 흔적들이 노출되는데 이러한 유적을 동굴. 혹은 바위그늘유적이라 한다.
지금으로부터 2만 년 전쯤 뷔름빙하기 마지막 빙기의 혹독한 추위가 절정에 달하고 1만 3천년 전쯤에는 기후가 현저히 따뜻해지며 1만 년 전에는 거의 지금과 같은 기후로 회복된다.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추운 초원지대였던 북반구 지역은 숲으로 뒤덮이고 사람들은 변화된 환경에서 새로운 식량감을 찾아야 했다. 초원을 떼지어 다니는 몸집이 큰 동물을 쫓아 사냥하러 다니기보다 호수나 바다, 강가에 정착하여 물고기를 잡거나 숲 속의 다양한 식물성 식료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도래한 시대를 중석기시대라고 하는데 이 때의 사람들은 물가에 작은 취락이나 조개무지, 혹은 공동묘지들을 남겼으며 일부 생태적인 여건이 양호한 지역에서는 정착취락을 형성하기도 했다.
오랜 수렵채집생활을 버리고 농경을 시작하게 된 신석기시대로 접어드는 것은 인류사에서 일대 전환기가 된다. 식량의 안정적인 확보로 인구가 늘고 오랜 이동생활을 청산하고 반영구적인 주거지를 마련하게 된다. 숲을 벌목하고 지형을 평탄하게 하면서 강의 물을 끌어들여 경작지를 마련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사람이 사는 경관을 크게 바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특별한 제작소가 있는 취락, 의례용이나 군사용 거점으로 활용되는 취락, 지배자가 거주하는 취락 등 그 기능에 따라, 토기제작소, 창고, 환호 및 목책 등 취락시설물이 갖추어진 것들도 나타난다. 그리고 고인돌과 같은 지배자의 분묘, 거대한 목조 석조의 기념물들을 축조하기도 했다. 신석기시대 농경사회가 성숙해지면서 선사유적들은 다양한 규모와 구조로 발달하게 되며 이후 청동기시대 문명화의 진행에 따라 도시의 발생으로 절정을 이룬다.
유물이라 하면 토기나 자기, 혹은 석기 한 점과 같이 작고 휴대가 가능한 인공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고고학에서는 인간 행위에 의해 제작되거나 변경되어 사용되었던 모든 물적 대상을 유물이라고 정의한다. 선사시대 만들어진 작은 소품도 유물이지만 거대한 구조물도 일종의 유물이며 집터에서 나온 자갈돌도 선사인이 주어와 위치가 변경되었으므로 유물인 셈이다. 특히 현대고고학에서는 인공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태자료도 중요한 유물이 된다. 예컨대 사람들에 의해 재배된 곡식 낱알이 탄화된 채 주거지 바닥에서 발견되면 그것도 귀중한 유물이다. 사람이 사냥해서 먹고 버린 동물뼈 역시 유물일 수밖에 없고 사람들이 살면서 유적의 토양이 변질되면 그것도 유물인 셈이다. 구석기시대 유물 중 인공물은 석기가 대표적이다. 영국의 클락톤유적에서 습지에서 나무를 깎아 만든 창이 발견되었지만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이 인류사의 오랜 기간동안 고고학 및 인류학자들이 각별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선사시대인들을 둘러싼 환경이다. 당시인들이 어떻게 적응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고환경을 복원하는 일이 꼭 필요하고 그래서 유적 토양에서 세심하게 꽃가루나 기타 미세한 동식물의 잔해들을 유물로 수집한다.
전통적으로 고고학자들은 토기나 석기와 같은 유물이 시기에 따라 변천하고 지역이 다르면 유물의 형태도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정한 유물이나 유물군의 변화를 시간과 공간적인 단위로 배열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20세기 전반의 고고학자들은 같은 형태의 유물들이 규칙적으로 함께 나오면 그것을 고고학적인 문화라고 정의하고 그러한 고고학 문화의 이면에는 그것을 사용하던 민족, 혹은 종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물에 대한 그와 같은 이해의 방식은 시간과 공간의 틀에다 놓고 유물의 변화를 서술할 때는 적합한 관점이지만 그 이상으로 과거의 사회와 문화를 설명하는데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20세기 중반 이후의 고고학자들 중에는 유물에서 인간행위를 어떻게 추론하고 복원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는데 몰두하는 연구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유물은 당시 사회·경제적 관계를 반영할 뿐 아니라 생산·소비되는 과정에서 의미작용을 한다고 생각하여 수준 높은 사회이론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연구자도 있다.
유물, 유적으로 대표되는 고고학 자료는 시간적, 공간적, 또는 역사적으로 현재와 격리되어 있다. 고고학 자료에 과거사회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과거사회 혹은 과거의 인간행위와 연결시키는데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다. 첫째는 유물, 유적은 선사시대의 사회상을 알아내기에는 지극히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다는 사실이다. 즉 폼페이유적처럼 과거의 상태 전부가 순식간에 화석화된 것도 아닐뿐더러,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 변형되거나 썩어 없어졌기 때문에 불완전한 상태로 현재 잔존할 뿐인 것이다. 예컨대 나무나 섬유, 뼈 와 같은 유기질 유물도 잘 남아 있으려면 특별한 보존의 조건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로 유물이나 유적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남겨 놓은 채 꼼작도 않고 있는 상태이다. 즉 어떤 형태의 유물이 어떤 위치에 있다는 정보일 뿐이다. 유물을 남긴 과거 사회와 인간의 행위는 역동적이었을 것이며 현재 남은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그것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현대 고고학자들은 지금 살아 움직이는 수렵채집민들이나 전통사회들을 찾아가 그들의 생계경제의 활동이나 물품의 제작, 혹은 기타 일상생활을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물질문화가 남겨지는 방식과 어떻게 관련지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물·유적에 대한 연구는 궁극적으로 과거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복원하고 그 변동과정을 설명해 보기위한 노력들이라 할 수 있다.
강원특별자치도의 동해안에 면한 강릉지역은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 그리고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인간집단에 점유되어 많은 유적들이 남겨지고 그 안에 축적된 유물들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강릉지역에는 구석기시대 석기유물을 포함하고 있는 고토양층이 곳곳에 남아 있다. 홍적세의 기간 중에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면서 해수면이 그에 따라 지금보다 낮아지거나 다시 높아지고는 했다. 그러한 지형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깎여나가지 않는 고토양층에서는 흔히 많은 구석기유물이 발견된다. 강릉지역의 해수면의 변동에 따라 퇴적과 침식이 반복되면서 살아남은 해안과 하천변에 단구면이 군데군데 잘 발달되어 있다. 강릉시 강동면 심곡리일대의 해발 100미터 위의 해안 단구면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중부홍적세 이전에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거칠게 제작된 주먹도끼와 찍개류들을 전기구석기시대 유물로 보고 있다. 심곡리와 가까운 금진리와 안인리 일대에서도 단구면이 발달하고 석기가 채집되고 있다. 강릉시 내곡동, 담산동 일대, 그리고 옥계면 현내리와 주수리 일대에서도 해발 20m 내외의 높이에서 단구면 확인되는데 각 지점에서 석기들이 채집되었다. 낮은 단구면의 고토양층은 심곡리와 같은 높은 지대보다 늦은 시기에 속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출토되는 석기들도 소형화된 것으로 늦은 시기로 추정된다. 그러나 강릉지역의 단구면에서는 아직 후기구석기시대 늦은 시기에 속하는 전형적인 돌날석기와 같은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안의 신석기 유적과 유물은 양양군 오산리유적이 발굴되면서 크게 주목 받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신석기시대 토기라면 빗살무늬토기가 대표였고 신석기시대의 개시연대도 지금으로부터 6천 년 전쯤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양양의 오산리유적에서는 이른 바 ‘오산리식토기’라고 이름 붙여진 토기가 나왔는데 아가리가 넓고 바닥은 극히 좁은 납작바닥이며 빗살무늬 토기처럼 모래가 많이 섞인 점토를 사용하지 않고 점토질이었다. 이 오산리식토기는 방사성 탄소연대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8천년 이전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아주 이른 단계의 신석기문화이다. 영동지방의 신석기문화는 토기, 주거지, 생산도구의 형태에서 특징적인 양상을 보여주며 여러 지역의 문화들이 들어와 서로 섞이는 점도 중요한 특색 중에 하나이다. 오산리식토기와 융기문토기가 유행하던 신석기시대 조기문화는 전형적인 서해안식 빗살무늬토기가 영동지방으로 전해지면서 대체된다. 이 빗살무늬토기가 나오는 유적으로는 강릉의 초당동유적이 대표적이며 강릉과 인접한 양양 지경리 유적에서도 그러한 양상이 확인 된다. 이 시기의 토기문화에는 황해도와 한강 하류역의 즐문토기문화가 영서지방을 거쳐 유입되고 금강유역이나 남해안지역의 문화요소도 섞여 있음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 영동지방 주민은 해안가에서 집중적으로 거주 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유적은 석호 연변의 사구지대에서만 발견된다. 석호와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식량자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신석기인의 마을은 해안가 사구지대에 집중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이와는 상당히 다른 구릉성 주거도 발견된다. 강릉 지변동유적과 같은 경우는 발굴조사 결과 바다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구릉 상에 거주 하였던 사람들이 버린 토기편과 석기들이 구릉 하단의 곡저에 퇴적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로서는 조금 늦은 시기로 편년할 수 있는 이 지변동유적의 양상은 아무래도 숲에서 채취할 수 있는 식량감에 더 의존했던 사람들이 거주한 결과로 이해되며 이와 비슷한 성격의 것으로 강릉에는 교동, 유천동, 안현동 신석기시대 유적이 있는데 모두 구릉상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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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목도패총 패각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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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석기(양양 오산리유적)
강릉의 청동기시대의 유적들은 구릉지 곳곳에서 흔하게 발견되며 주요한 유적으로는 취락지와 고인돌 유적이다. 전기에 속하는 유적으로는 강릉 교동유적과 방내리유적 등이 있다. 이중에 이른 시기에 속하는 교동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이중구연에 단사선이 들어가 있는 무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공열이 들어가 있는 것도 보인다. 전기의 취락은 구릉에서만 발견되는데 주로 하천변이나 석호 주변의 낮은 구릉에 입지하므로 산지 가까이로 진출하지 않고 바다에 가까운 구릉지대가 주로 점유된다. 영동지방 청동기시대 중기에 속하는 유적의 양상은 전기나 후기에 비해 불분명한 편이며 강릉지방에서 중기에 해당할 만한 유적은 찾기 어렵다. 후기에 속하는 강릉 방동리유적은 사천천 가까이에 위치한 구릉지대에서 발굴된 점토대토기단계의 취락이다. 나지막한 능선들이 연속되는 가운데 세 지점의 구릉 위에서 취락이 확인되었는데 이전 시기의 어느 취락보다 규모가 크다. 원형의 수혈유구들은 저장시설로 기능이 추정되고 있는데 2-3의 주거지와 함께 군을 이루고 있어 세대공동체와 같은 집단의 구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방동리 유적에서는 가장 높은 구릉에 이중환호 유구가 발견되어 원시적인 방어시설로 추측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후기가 끝나고 철기시대가 시작되면서 강릉지역의 고고학적 문화내용은 일변한다. 그 변화의 양상은 결코 점진적이라고 표현할 수 없으며 급격한 문화적 교체와 같은 것으로 묘사하지 않을 수 없다. 소형의 방형, 혹은 원형의 주거지가 구릉지대를 점유하는 청동기시대의 취락은 소멸하고 철기시대가 되면 모든 취락은 다시 해안의 사구지대로 이동하며 주거지의 형태도 凸자형, 혹은 呂자형의 매우 대형화되고 정형화된 움집이 축조된다. 토기의 양상에서도 청동기시대 후기 원형점토대토기의 기종이나 기형들을 철기시대에는 전혀 볼 수 없고 흔히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라고 부르는 바리와 항아리 단지, 그리고 대접들과 함께 소량의 타날문단경호가 주류를 이룬다. 그밖에 다른 물질문화요소에서도 이전 단계의 양상이 거의 소멸하고 새로운 양상으로 대체된다. 특히 강릉의 안인리, 동덕리, 교항리, 초당동, 강문동 유적은 이시기 영동지역 철기문화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철기문화는 5세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신라문화로 교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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襄陽 地境里 遺蹟 (양양 지경리 유적)
- 유적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지경리
- 시기 : 신석기시대
- 조사연도 : 1995~1996년
지경리 유적은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과 주문진읍의 경계지역으로 화상천과 동해가 인접해있는 낮은 모래언덕의 서남쪽 충적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동 유적은 1995년 4월부터 1996년 1월까지 강릉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여 신석기시대 주거지 10기, 철기시대의 주거지 7기, 야외 노지 3기 등이 조사되었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원형과 말각방형이며 그 중 4호 주거지에서는 빗살무늬토기 15점, 숫돌 2점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들 중에는 북한에서 가장 빠른 신석기 유적인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1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것과 똑같은 형식의 토기와 함께 함경남도 강상리형 토기와 중부지방의 암사동계 토기가 함께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중기 유적에서 동북, 동남, 서북, 중부지방의 토기가 함께 출토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우리나라 각 지역간의 신석기 시대 문화의 상대편년과 문화교류 관계 및 신석기 시대 중기 주거지의 형태와 가옥구조를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이 밖에 야외 노지 3기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구 중 그 잔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여 주거지 밖의 공용시설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